기 간 : 2020년 5월 6(수)~2020년 9월 13일(일)까지
장 소 :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2층 서화실
전시품: 이항복 호성공신 교서 등 29점

[와이즈경제=황현옥 기자] 국립중앙박물관은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 자 자상子常, 호 백사白沙·필운弼雲·동강東岡) 종가(宗家) 기증품을 최초로 공개하는 ‘시대를 짊어진 재상 '백사 이항복 종가 기증전'을 개최한다고 6일 밝혔다.

이항복 위성공신 초상(부분)/사진=국립중앙박물관
이항복 위성공신 초상(부분)/사진=국립중앙박물관

이항복은 지혜와 기개로 임진왜란(1592년 음력 4월 13일 발발)을 극복하는 데 큰 공을 세운 명재상이다. 이번 전시에서 경주이씨慶州李氏 백사공파白沙公派 종가 기증품 17점과 국립중앙박물관 기존 소장품 중 이항복 관련 12점을 선보인다.

박물관에 따르면, 후손들의 숭고한 기증 정신을 드높이면서, 선조宣祖(재위 1567-1608) 임금 때 임진왜란이라는 국가 위기 상황을 타개하고, 광해군光海君(재위 1608-1623) 때 인목왕후仁穆王后(1584-1632)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는 등 당색에 치우치지 않고 나라의 안위를 중시한 진정한 재상으로서의 이항복의 역할, 그의 개인적인 삶과 문예 세계 그리고 그에 대한 후대의 평가 등을 다각도로 조망하는 최초의 전시이다.

◇ 나라의 안위를 짊어진 이항복의 삶

이항복은 25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관직을 시작했다. 37세 때인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도승지로서 선조 임금의 피란길을 호위했고, 분분한 조정의 논의를 조율했다. 전쟁 중 여러 차례 병조판서를 맡아 군사행정에 역량을 발휘했으며, 명나라 지원군 요청을 주장하여 전세를 뒤집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정유재란 때 명나라 관리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내통한다고 모함하자 북경에 사신으로 가서 이를 해명하는 등 외교에도 힘썼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1604년에는 호성공신扈聖功臣 1등이 되었고, 1613년에는 위성공신衛聖功臣 1등이 되는 등 생전에 다섯 차례 공신의 반열에 올랐다.

만년에는 광해군의 인목왕후 유폐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결과 반대파의 탄핵으로 함경도 북청에 유배되어 죽음을 맞았다. 이항복은 전란을 극복한 명재상이자 자신을 돌보지 않고 임금을 바른 길로 이끌고자 한 선비의 표상으로 후대에도 길이 존경받았다.

◇ 종가에서 소중히 지켜 온 이항복의 유산

제1부에서 가장 주목되는 전시품은 이항복의 공신 관련 기증품으로 <이항복 호성공신 교서 李恒福 扈聖功臣敎書>, <이항복 호성공신상 후모본 李恒福 扈聖功臣像 後模本> 및 <이항복 위성공신상 후모본 李恒福 衛聖功臣像 後模本> 이 있다.

<이항복 호성공신 교서>는 현존하는 유일한 호성공신 1등 교서로, 당대의 명필 석봉石峯 한호韓濩(1543-1605)가 글씨를 썼다. 교서에 적혀 있는 선조 임금의“사람들은 그대를 믿고서 조금 안정되었고, 조정에서는 그대를 의지하면서 소중하게 여겼다.”라는 평은 이항복이 임진왜란 극복에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잘 보여준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기증 후 연구를 진행하면서, 이 교서가 원본이 아니라 부본副本(원본과 똑같이 작성하여 보관한 문서)임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이항복이 받은 교서의 원본이 병자호란으로 소실되자 이항복 증손 이세필李世弼(1642-1718)이 한호의 집안에서 부본을 구하여 충훈부忠勳府에서 올려 국새를 받아 보존한 것이다. 조선시대 공신교서의 중요성과 후손들이 보존을 위한 노력을 보여주는 산물이다.

<이항복 호성공신 초상>은 49세 때의 모습으로, 호성공신 초상을 후대에 옮겨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공신상은 후손들이 귀하게 보존하였으며 초상이 낡으면 이를 옮겨 그려 다시 모시는 것이 전통이었다. <이항복 위성공신 초상>은 58세 때의 초상으로 임진왜란 때 광해군을 호종한 공으로 받은 공신상을 후대에 옮겨 그린 것이다.

두 공신상을 비교해 보면 얼굴의 주름이 늘어나는 등 9년이라는 세월의 흐름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이항복의 초상으로 잘 알려진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이항복 초상 초본>은 <이항복 위성공신 초상>과 이목구비가 거의 비슷해 위성공신 초상 제작을 위해 그린 밑그림으로 볼 수 있다. 공신 임명은 가문의 영광으로서 교서와 초상은 종가에서 대를 이어 귀중하게 보존해 왔다.

이항복이 손수 쓴 『천자문千字文』은 붓으로 쓴 천자문 중에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책이다. 여섯 살 손자 이시중李時中(1602-1657)에게 써 준 것으로, 한 자씩 공들여 쓴 글씨의 골격이 굳세고 획이 날렵하다. “오십 먹은 노인이 땀을 닦고 고통을 참으며 쓴 것이니 함부로 다뤄서 이 노인의 뜻을 저버리지 말거라.”라고 쓴 당부의 말에 손자를 향한 애정이 담겨있다.

또한《이항복이 손수 쓴 제례에 대한 글》은 중국 경전인『예기禮記』에서 제사의 본질과 관련된 글을 뽑아 쓴 것으로, 이항복의 드문 친필로 가치가 높다. 이항복은 후손들이 제사 때 절하는 의식을 무턱대고 따라할 뿐, 그 의의를 아는 사람이 없어 옛 경전에서 뽑은 글을 병풍으로 만들어 평소에 익히도록 하였다.

《백사수적첩白沙手蹟帖》은 이항복이 젊은 시절 당시唐詩를 공부하기 위해 쓴 글을 그의 5대손이자 영조 때 영의정을 역임한 이광좌李光佐(1674-1740)가 모아서 18세기 전반에 첩으로 만들어 보존한 것이다. 이 첩은 이항복의 친필이며, 조선시대 문인들이 시를 공부하기 위한 학습법을 보여준다는 데에 서예사와 문학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 대대로 이어온 명문가의 품격

경주이씨 백사공파는 이항복 이래 여러 명의 재상을 배출한 명문가이다. 종가 기증품 중 증손 이세필李世弼(1642-1718)의 초상화 1점과 1804년(순조 4) 이경일이 수원부유수水原府留守로 임명되었을 때 받은 <유서諭書> 1점을 주목할 만하다.

이경일이 받은 유서는 조선시대 지방관의 군사 동원권을 증언하는 희귀한 자료이다. <이세필 초상>은 유학자의 평상복이자 공식적인 예복인 심의深衣를 입고 복건服巾을 입은 노년의 선비를 섬세한 필치로 그려낸 작품이다. 이세필은 송시열이 1674년(현종 15) 제2차 복상 문제로 송시열이 삭직되자 그는 친분이 없었던 송시열을 옹호하다가 영광으로 유배되었다.

훗날 그가 <이항복 호성공신 교서> 부본을 찾아 나라의 승인을 받은 후, 송시열에게 발문을 청해 받은 기록을 『송자대전宋子大全』 제148권에 「백사 이문충공 녹권 뒤에 쓰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 후대인이 이항복을 기억하는 법

제2부 ‘임진왜란을 극복하고 후대에 기억되다’는 이항복의 학문 세계, 그와 함께 전란을 함께 이겨낸 인물들, 대의를 지킨 이항복에 대한 평가로 구성되었다. 이항복의 문집인 『백사선생집白沙先生集』, 중국 노魯 나라의 역사서『노사영언魯史零言』, 사례四禮에 관한 정신적인 계몽서인 『사례훈몽四禮訓蒙』 등의 전적 자료가 전시되어 이항복의 학문 세계를 살필 수 있다. 또한 이항복과 함께 전란을 이겨낸 인물들의 초상화 3점과 <이순신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의 탑본>과 같이 임진왜란에서 목숨 바친 인물이 후대에 기억되도록 이항복이 지은 글을 전시했다.

노량해전의 전황과 이순신의 죽음에 대한 동시대인의 안타까움이 잘 드러나 있다. <평양성전투도>는 조명연합군이 평양을 탈환한 승리를 그린 병풍이다. 임진왜란 극복에는 이항복과 같은 문신들이 외교관으로 큰 역할을 하였음을 느낄 수 있다.

이항복은 62세에 인목왕후 폐모론에 적극 반대하여 삭탈관직을 당하고 북청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63세로 생을 마감한 그의 마지막 자취를『백사북천일록白沙北遷日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후 그는 송시열과 같은 후대 사람들에게 대의를 위해 생명을 불사른 인물로 기억되고 높이 평가되었다.

◇ 이항복과 관련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서화

코로나 19 극복을 위해 전 국민이 노력하고 있는 2020년 현 시점에서 428년 전 봄날 임진왜란이 일어나 의주로 피난 가는 임금을 호종하고,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공헌한 명재상 이항복의 삶은 오늘날에도 큰 울림을 준다. 처음 공개되는 백사 이항복 종가 기증품을 감상하며 후손에게 이어져 온 그의 올곧은 정신을 함께 느껴보기 바란다고 박물관은 밝혔다.

                                                                                         주요 전시품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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